이성복, 살림.
1990년 11월 1일 초판. 12월 15일 2쇄.
<ㅉ=84>1
차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사사건건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 신기함이란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쳐 왔던 우리네 삶의 기본원리들을 다시 접했을 때 오는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라면 이미 차를 오랫동안 몰아왔던 사람들은 상당히 불우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원리들이 몸에 배어서 나날의 습성 속에 숨어 버리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고서 신기함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 관심은 항용 대상과의 만남에 따르는 위험과 그 위험에 대한 불안을 내포한다. 삶의 여러 일 가운데 '씨 없는 수박'같은 것은 없다. 다시 말해 불안 없는 관심, 관심없는 신기함은 없는 것이다. 서로 신기함의 안팎을 이루는 관심과 불안을 우리는 저 케케묵었지만 고요히 빛나는 경(敬)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자. 상대에 대한 공경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
<ㅉ=85>운전의 선배들이 초심자들에게 당부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자기 차가 무언가에 스쳤다고 느끼는 순간 무조건 브레이크를 밟으라는 것이다. 시동이야 꺼지든 말든 문제가 아니다. 브레이크를 잡아야만 내 차도 남의 차도 더 이상 상하지 않는다. 그런데 운전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는 사실은 차를 몰로 가기보다는 멈추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가고 싶을 때 가고 멎어야 할 때 그윽히 멎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는 가까운 개인사로부터 역사적 체험에 이르기까지 뼈저리게 알고 있다. 분명히 멎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쯤 하면 되겠지'하고 밀어부치면 상대방의 옆구리도 내 옆구리도 다 우그러들고 만다.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세 가지 큰 덕목 가운데 선인들이 마지막으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을 든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초보자들에게 가장 어렵고 그러므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내 차가 상대방 차에 스치는 그 순간 감(感)이 없다는 것이다. 감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모하게 밀고 나가 보는 것이다. 감이수통(感而遂通)이라는 말이 있지만, 불감(不感)이면 불통(不通)이다. 피차간에 불행한 경험을 맛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가진 자의 못 가진 자에 대한, 배운 자의 못 배운자에 대한 불감증이 어떤 참혹한 결과를 가져 올지를 차는 우리에게 냉정하게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기계는 너무도 비인간적으로 정직하기 때문이다.
<ㅉ=86>2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입히는 깊숙한 상처치고 상대의 아픔에 대한 불감증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없다. 상대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사랑까지도 상대에 대한 공경이 없이는 쉽게 폭력으로 전화됨을 우리는 종종 본다. 오직 느낌으로써만 통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알기만 하더라도 우리는 타인과 사물에 대해, 우리의 과격함으로 피멍이 든 삶에 대해 얼마나 겸손해질 수 있을까.
느낌이 없기 때문에, 혹은 우리 각자의 느낌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차에는 유격이라는 것이 있는가 보다. 클러치 페달에도, 핸들에도 다소간의 여유치가 있는 것이다. 피상적인 생각으로는 그 여유치가 기계작동을 굼뜨게 함으로써 운전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곰곰히 따져 보념 유격이란 사람의 뜻과 몸놀림을 부드럽게 억제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장치이다. 유격은 자신에 대한 반성과 상대에 대한 공경의 징표이다.
세상에서 사람이 만드는 재난의 태반은 자신의 신념이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며, 오직 자신만이 그 신념의 담보자라는 환상에서 오는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모든 재난은 바로 유격의 부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선이란 백 프로 증류수와 마찬가지로 논리적 극한치에 불과하며, 그것이 한 인간 혹은 한 집단의 전유물이 될 때 죄악과 허위로 들어가는 길목이 된다. 가령 오르막과 내리막은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언득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것이 불과하다. 절대선이 없다면 마찬가지로 절대악은 존재하지 않는 <ㅉ=87>것이다.
오늘 우리는 도처에서 총장실과 사장실, 모든 '장'자 붙은 방을 점거하는 벌떼 같은 무리들을 경악과 질서의 눈으로 바라본다. 확실히 그들의 행위에는 유격의 장치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을 유격이 없는 자동차처럼 거리로 나서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를 동시에 짚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돈이든 힘이든 이미 가진 자들의 유격의 부재가 얼마나 뿌리깊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는가를 반증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언제나 기득권은 당연시되는 반면 당연한 권리의 주장은 불순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주위에서 만원버스에 실려 가는 사람들보다 스스로 차를 몰거나 몰려는 사람은 차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3
좁은 공간에 차를 집어 넣을 때는 앞으로 넣는 것보다 뒤로 넣는 것이 낫다는 사실은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의 허를 찌르는 대목이다. 뒤로 집어 넣는 것이 나을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주차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번 되씹어 보아도 신선한 느낌이 따른다. 그것은 아마도 차의 앞바퀴와 뒷바퀴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삶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만큼 별 힘이 안 들면서 그만큼 더 어려운 일이 있을까.
작전상 후퇴라는 말이 있지만 여기서 뒤로 물러난다고 하는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서 하는 말이다. 삶은 작전이 아니다. 굳이 작전이라 한다면 타인과 세상에 대한 싸움<ㅉ=88>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우리는 타인과의 불편한 만남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을 수치스러운 패배로 여기는 듯하다. 실상 수치는 물러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죽치고 늘어붙는 데 있는 것이다.
차에서뿐만 아니라 춤에서도 남자의 첫걸음은 후진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후진은 상대의 전진을 의미한다. 그 반대의 경우는 춤이 아니라 힘 겨루기에 불과하다. 후진은 춤에서만 아니라 모든 유형의 만남의 예(禮)이다. 예가 없는 만남은 짐승들의 무리와 다를 바 없다. 예는 상대에 대한 공경의 흔적이며, 그 흔적은 또한 자신에 대한 상대의 공경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요즘은 그 흔적을 사람들에게서보다는 짐승들에게서 찾아보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적어도 짐승들은 후진의 페인트 모션을 쓸 만큼 교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만남의 후진이 가뭇없는 후진의 연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후진은 전진의 첫 걸음에 불과하며 전진은 또다른 후진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밤과 낮, 끝과 시작, 들숨과 날숨, 듣기와 말하기처럼 전진과 후진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도는 두 마리의 뱀과 같다. 그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어느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전진은 좋은 것이고 후진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은 그릇된 것이다. 그러한 어리석음을 경계하여 옛 사람들은 양음(陽陰)이라 하지 않고 음양(陰陽)이라 하였으며, 시종(始終)이라 하지 않고 종시(終始)라고 하였던 것이다.
<ㅉ=89>오늘 우리 주위는 온갖 차들이 빼곡이 들어찬 주차장과 같다. 각각의 이해와 주장이 얽혀 자칫 분별을 넘어서면 남의 옆구리를 받거나 제 옆구리가 찢어지기 일쑤이다. 제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좁은 공간일수록 후진해야 한다는 소중한 가르침을 차에게서 발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4
운전면허 시험 가운데 특히 코스 시험에 대해서는 그것을 꼭 치러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다년간 운전을 한 영업용 기사라도 떨어지기 십상이며 도무지 현실에서는 Z코스, S코스, T코스 같은 상황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말도 맞다. 그러나 요즘도 코스 시험이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의 존재이유가 있을 법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세 가지 코스는 실제의 운전에서 부딪칠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의 기본적인 구조가 아닌가 한다. 즉 갖가지 상황에서 무리 없이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 기본 코스의 응용과 변용에 의해서이다. 세 가지 코스가 체(體)라면 실제의 운전은 용(用)이 되는 것이다. 체는 용을 통해 드러나며 용은 체에 의해 지탱된다. 체가 용이 아니기 때문에 불필요하다든가, 용의 차원에서 체만을 고수하려 드는 것은 여러 분야에서 소모적인 싸움의 발단이 될 뿐이다.
면허시험의 세 가지 코스는 우리가 삶에서 걸어가야 할 원초적인 길이 어떤 것인가를 은유적으로 드러내 준다. 왜냐<ㅉ=90>하면 인생은 먼 길을 가는 과정이며, 젊어서나 늙어서나 좀처럼 서투르고 어색한 것은 초보자의 자동차 운전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왼쪽으로 박힐 것 같아 오른쪽으로 꺾으면 이번엔 오른쪽으로 처박히고 말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 서투름은 고쳐지지 않는다. 인생은 늘 새롭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새신랑처럼 어색하다. 거듭되는 역경의 Z코스, 완만한 슬픔의 S코스, 그러나 그 중에서도 T코스는 보다 깊은 삶의 근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T코스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좌측선에 차를 최대한으로 붙이고 중반을 넘어서면 핸들을 꺾어 앞바퀴와 좌측선 사이에 백 이십 센티를 확보한다. 그것은 안전하게 후진하여 T코스의 아랫도리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랫도리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선 차는 출발선을 향해 돌아나오게 된다. 이와 같은 T코스의 구조는 모든 시간예술의 기본이 되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골격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 구조는 예술뿐만 아니라 진실의 기본구조이기도 하다. 후진 혹은 역전이 없는 진실은 일방적인 자기 주장에 불과하며, 따라서 악성 이데올로기에는 후진과 역전이 없다. T코스가 모든 예술과 진실의 기본구조가 되는 것은 삶의 구조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경험에서 시작하여 싸늘한 인식으로 끝나는 한 편의 성장소설을 우리는 T코스에서 읽는다.
5
흔히 우리는 사람 사이의 예(禮)가 실질과는 다른 겉치레<ㅉ=91>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지만, 그것은 예의 본뜻을 잊어버린 데서 오는 결과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이 나 아닌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사물들과의 '대화'로 성립한다면, 예는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 긴히 갖추어야 할 전제조건이 된다. 그 전제조건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상대에 대한 공경으로서, 이 둘은 예의 표리를 이루는 것이다.
운전연수에서 여러 코스들의 훈련이 사람들과의 삶에서 지켜져야 할 기본적인 예의 교육으로 비유될 수 있다면, 그 예의 필연성은 실제의 운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차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운전자의 시야는 좁아진다.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일지 모르나 가까이 있는 것은 희미하게만 보일 뿐이다. 이와 같은 경우는 현실의 삶에서도 자주 경험하는 일이다. 우리의 뜻이 과격하면 할수록 우리의 시력은 흐려지며, 그리하여 우리 가까이 다쳐서는 안 될 것들을 다치게 된다. 과격은 맹목을 낳고 맹목은 또다른 과격을 부른다. 과격하기 때문에 맹목적이고 맹목적이기 때문에 과격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차의 속도가 빠른 상태에 있을수록 정지거리가 길어진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나의 뜻하는 바가 과도하면 할수록 나의 상대가 치명적인 충격을 받을 가능성은 그만큼 늘어난다. 게다가 그 정지거리가 공주(空走)거리와 제동거리의 합산이라는 사실도 주목을 요한다. 공주거리란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부터 실제로 듣기 시작하는 순간까지 주행한 거리를 말한다. 비로소 내가 나의 과격함을 깨닫고 제동을 <ㅉ=92>시작했다 하더라도 상대는 나로 인한 치명적 충격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행위에는 관성이 작용하며, 나의 상대 사이에는 공주거리가 존재하므로.
예로부터 성인의 말씀은 박절하지 않다고 한다. 그 말의 내용이 무엇이든 박절한 말은 대체로 옳은 말이 아니다. 극단은 또다른 극단을 낳을 뿐이다. 좌충이 우돌을 부르고 우돌이 좌충을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은 호메이니의 말이지 성인의 말씀은 아닐 것이다. 성인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 변환기는 사필귀정의 기치를 높이 들고 앞만 바라볼 뿐 옆을 돌아보지 않는, 상대에게는 냉혹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용기 있는 사람들의 시대이다. 그들의 뜻은 급하고 그들의 시야는 좁다. 어찌 삼가하고 삼가하지 않을 수 있으랴.
6
자신에 대한 반성과 상대에 대한 공경이 예의 안팎을 이루는 것이라면, 이 둘은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란 자신의 과도함에 대한 성찰이며, 그 과도함으로 인해 겪게 될 상대의 아픔에 대한 심려이다. 그렇다면 상대에 대한 공경이란 그 성찰과 심려의 구체적이며 적극적인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자기 반성에 뿌리내리지 않은 사랑은 쉽게 광기와 난폭의 원동력으로 전화된다.
예를 이루는 반성과 공경의 표리관계는 과속과 법규위반의 <ㅉ=93>무법천지에서도 간혹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차가 섰을 때 앞차를 위해 자신의 헤드라이트를 꺼준다거나, 앞서가는 차와 마주보고 오는 차를 위해 자신의 헤드라이트를 아래로 숙이게 하는 것은 마치 공손하게 절하는 아이의 모습처럼 이쁘다. 그것은 자신의 불빛으로 인해 상대의 눈이 '현혹'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온 일일 것이다. 나의 전조등은 내가 갈 길을 비추어 주는 없어서는 안 될 불빛이다. 그러나 그 불빛이 상대가 자신의 길을 찾는 데 장애가 된다면 마땅히 끄거나 낮추어 주어야 한다. 언제나 나의 불빛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다. 예는 상대에 대한 나의 '숙임'과 '낮춤'이다.
이러한 예의 구체적 실현은 차들이 의좋게 나란히 달릴 때뿐만 아니라 서로를 넘보고 앞지르기할 때조차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뒤차가 자신을 앞지르려 하거나, 앞차가 그 앞차를 앞지르려 할 때 자신이 앞지르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미 앞지르기를 시작한 상대에 대한 따스한 심려에서 나온 일일 뿐더러, 자신의 안전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일이기도 하다. 앞지르기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험 속에 내거는 일이며, 앞지르기하는 차를 다시 앞지르기한다면 그것은 곧 상대방의 위험을 가중시키는 동시에 그만큼의 위험을 자신의 부담으로 안는 일이 된다. 상대의 인격을 자신의 발 밑에 놓을 때 자신의 인격도 동시에 그 밑에 놓는 일이 되며,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일이 곧 자신의 숨통을 조이는 일임을 우리는 익히 알지 않는가.
더불어 두 개의 차선을 걸쳐서 운행해서는 안 된다거나, <ㅉ=94>급제동을 삼가고 여러번 브레이크를 밟아 주어야 한다거나, 진로를 변경할 때는 충분히 알린 다음이어야 한다는 교훈도 같은 맥락에서 새겨 들을 수 있다. 예의 준수 여부는 자신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예의 준수 여부는 자신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어찌 예의 가치를 효용의 관점에서만 이야기할 수 있으랴. 다만 예의 무시로 인해 오게 될 끔찍한 재난을 근심스럽게 지켜볼 따름이다.
7
초보자의 운전은 뒤에서 보아도 표가 난다. 대체로 초보자들은 속도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천히 가는 것을 안전의 표준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정도 이상으로 천천히 가는 것은 정도 이상으로 빨리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속에 해당될 수 있다. 마치 선인들이 과도하게 공경하는 것이 예가 아님을 강조했듯이, 문제는 객관적인 속도의 수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상황에서 얼마만큼의 빠르기가 가장 적합한가에 달려 있다.
요는 주위의 차들과 함께 '흐름'을 타는 일이다. 안전한 속도는 일정하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상황에서는 20km가 안전속도일 수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120km가 안전속도일 수 있다. 만약 60km 정도를 표준속도로 잡고 어느 상황에서나 그 속도를 고수하려 한다면, 그것은 아교처럼 굳어버려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통하지 않는 것을 막무가내로 밀어부칠 때, 상대뿐만 아니라 자신도 함께 부서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ㅉ=95>알려고 하지 않는다. 가장 적합한 것은 언제나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을 같은 것이라고 우길 때 '흐름'은 깨지고 만다.
흔히 우리는 도덕군자들이란 감각이 메말라 비틀어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감각이 탁월하지 않고서는 덕이 이루어질 수 없다. 감각에 뒷받침되지 않은 덕은 죽어버린 덕의 껍질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고루함은 감각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다. 그 감각이란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의 '흐름'에 대한 감각이다. '흐름'에 대한 감각은 올곧은 것(正)보다는 가운데 오는 것(中)을 중히 여긴다. 올곧은 것은 때로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흐름'을 깨뜨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흐름'의 지각과 '흐름'에의 동참은 운전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요체가 된다.
따라서 '흐름'에 대한 감각은 모든 공부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동시에 필수요건이라 할 수 있다. 그것 없이는 대의가 무엇이건 간에 사람 잡는 공부가 되기 십상이다. 감각하지 않고서는 반응할 수 없다. 감응을 통해서만 세상의 이치에 순응할 수 있으며, 그때서야 나와 당신은 통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이 일시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천지가 다함이 없는 것은 음양 교접의 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공자(孔子)께서 살아계신다면 참으로 멋진 운전을 하시리라.
8
궁극적으로 삶이 대화의 과정이라면 대화는 길의 모습을 <ㅉ=96>닮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들 각자의 삶은 길과의 대화이다. 느껴서 비로소 통한다는 것은 삶의 길에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이른바 도통(道通)이다. 흔히 도통이라 하면 인간세를 떠난 사람들의 알음알이로 여기지만, 그것은 문자 그대로 길에 통하는 것을 뜻한다. 아스팔트 길이든 포장 안 된 골목길이든 길은 어디에나 있으며, 모든 길을 서로 다른 길이 아니다. 길은 별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 우리 몸 속에 들어 있다. 별천지에는 길이 없다. 그것은 바로 길이 끊어진 자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여러 학문의 병통은 삶을 떠난 자리에 길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데 있다. 가까이는 내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외물에서 취하는 공부가 아니라면 죽은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 내 몸 속에 숨어 있는 길과 나 아닌 다른 사람, 사물들 속에 숨어 있는 길은 둘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길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들 속에도 숨어 있다. 그 길은 사람에게서 나왔지만 사람은 그 길을 모르고 밟고 간다. 차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길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길을 알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길에 대한 관심을 한 순간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 길에 대한 관심이란 그 길을 숨기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배려, 그림자처럼 우리를 놓아 주지 않는 삶에 대한 따뜻한 눈길을 의미한다. 언제나 길은 사랑과 함께 온다. 차에 대한 심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날 시동을 걸면서 차가 아플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중도에 멎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또한 몇해 동안 <ㅉ=97>타고 다니던 차를 팔고 나면 같은 색깔의 차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한다. 그것이 소유욕에서만 비롯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 마음은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해 금붕어나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다른 것이 아니다. 정이 들면 사람뿐 아니라 식물도 남이 아니다.
새 차를 사서 시트에 덮인 비닐을 뜯어내는 순간 차는 이미 새 차가 아니다 그 순간부터 문짝에 흠집이 나고 휀더가 우그러지는 먼 먼 날의 상처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디 차만의 일이겠는가. 우리의 삶은 애초에 새 것이 아니며, 새로운 삶은 추억으로서만 존재한다. 사람들은 아롱지는 불빛을 보고 홍등가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꼭히 맞는 말은 아니다. 홍등가의 불빛은 이미 마음 속에 있다. 마음 속의 불빛이 자기를 닮은, 그러나 언제나 실망만 가져다 주는 마음 밖의 불빛을 찾아가는 것이다. 잃어버린 삶을 그리워하는 마음 속의 불꽃, 그곳으로부터 모든 길은 시작되고 그곳에서 모든 길은 끝난다.
9
차를 타고 가다보면 백 미러에도 안 나타나고 실내 거울에도 안 잡히는 것이 있다. 그걸 때 혹 차선을 바꾸려 하면 느닷없는 울부짖음 같은 경적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맹목의 공간, 이른바 사각지대(死角地帶)는 우리 눈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감각들에도 존재하며, 감각에 잡힌 것들을 종합하는 지적 기능들에도 존재한다. 우리의 삶은 사각지대로 뒤덮인 늪과 같다.
<ㅉ=98>아무리 많은 길을 가도 모르는 길이 남아 있으며, 같은 길을 여러번 가 보아도 모르는 구석이 남아 있다. 한 이불 속에 오래 살 섞었던 사람끼리도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발견하게 되며, 그 발견은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해 다만 정지될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길에 통한다는 말은 빈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평선처럼 영원한 미래로서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이다. 아마도 성인은 그 사실을 깊이 깨달으신 분이리라.
이른바 천명(天命)이라는 것은 우리 삶의 맹목점, 혹은 사각지대로 오는 것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일 것이다. 우리 삶의 지극한 의무는 우리가 지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영역들을 극진히 살피고, 지각과 판단을 넘어서는 부분에 대해서는 작위(作爲)를 그쳐야 한다는 데 있다. 여러 어리석음과 포학함은 지각과 판단의 사각지대에 대해서까지 관여하려는 겸허하지 못한 자세에서 오는 것이다. 사각지대를 사각지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나머지 삶을 맹목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삶의 사각지대로 오는 천명에 대해서는 성인도 어쩔 수가 없다. 이른 나이에 안연(顔淵)이 세상을 떠나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셨다'라고 거듭 통곡한다. 그를 따르던 사람이 슬픔의 과도함을 지적하자 공자께서는 '내가 지나치게 슬퍼했던가'라고 반문한다. 평소 슬픔의 과도함을 경계하였던 그가 스스로 과도한 슬픔에 빠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공자의 공자다움을 잘 드러내 준다. 마땅히 과도해야 할 때 과도한 것은 과도한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ㅉ=99>중도(中道)를 가는 성인의 성인다움이다. 역설적이게도 천명은 과도한 슬픔을 적합한 슬픔으로 바꾸어 준다.
길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오직 슬픔만이 그 길을 가지 못한 인간의 몫이다. 길이 인간의 몫이 아니기에 죽으나 사나 인간은 그 길을 가려 하며, 가도 가도 못다 간 길은 인간의 슬픔으로 녹아 내린다. 마치 정선 아리랑의 가락처럼 구비구비 펼쳐진 슬픔의 길 저 멀리, 성인은 앞서가고 계시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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